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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과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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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하라성은 누가 만들었어?

당시 영주이면서 키리시탄(당시 일본의 가톨릭 신자)이었던 아리마 하루노부가 만들었어. 하루노부는, 영지를 지키기 위해 키리시탄이 되었지.



Q. 키리시탄이 되는 것과 영지를 지키는게 무슨 관계가 있지?

당시 지금의 사가현에 해당하는 장소를 통치했던 류조지 타가노부라는 다이묘가 점차 권력을 키워갔고, 하루노부는 「자신의 영지도 언젠가 빼앗길지도 모른다」며 걱정을 했어. 그 때 생각해낸 것이 바로 키리시탄이 되는 것이었지. 키리시탄이 되면, 선교사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고, 그렇게 예수회나 포르투갈로부터 서양 무기를 들여올 수 있잖아. 당시의 최신 무기는 바로 철포였어. 사용하려면 화약이 필요했는데, 화약은 수입하는 것 밖에는 손에 넣을 방법이 없는 귀중한 재료였거든. 거기에 해외의 정보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는거지. 그러한 이유들로 「영지를 지키기위해 키리시탄 다이묘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Q. 그럼 명목상으로만 키리시탄이 되었다는 거야?

처음에는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전국시대의 험난한 시국을 살아가는 하루노부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어느샌가 마음을 둘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어. 결국 독실한 신앙심을 갖게 되었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종교 금지령을 내릴 때까지 하루노부는 수만명의 키리시탄들을 보호했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Q. 하라성 아주 가까이에는 히노에 성이 있는데, 두 성은 서로 어떤 관계야?

하라성은 히노에성의 「지성(支城)」이라고 할 수 있어. 비유하자면, 본점과 지점의 관계랄까? 하루노부는 히노에성에 살았었는데,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하루노부는, 지금 살고 있는 히노에성보다도 최적의 장소에 성을 만들기 위해 이사를 결심했다」는 내용이 남아있어.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성이 바로 하라성을 말하는 거야. 언젠가는 하라성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주변에 성 아랫마을을 만들려고 했던거지.


Q. 하라성은 굉장히 강한 성이었다고 하는데, 어디가 어떻게 강한거야?

먼저, 돌담 축벽을 튼튼하게 지었는데, 공격하기 어려운 최신 방법으로 만들었어. 하루노부는 하라성을 짓기 전에 임진왜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전투)에 출병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전투에 적합한 돌쌓기 기술을 배워 하라성을 건축할 때 참고했다고 해.
또 다른 하나는, 마스가타라 불리는 설계. 이건, 적이 들어와도 쉽게 혼마루, 즉 본성에 다다를수 없도록 하는 통로건설 방식이야. 적이 멀리 돌아서 오는 사이에 위에서 활이나 철포 등으로 공격할 수 있지.
그리고, 굉장히 넓게 지어진 것도 좀처럼 넘어뜨리기 힘든 강한 성이 된 이유 중 하나였어. 공격하는 쪽에서는 혼마루(본성)가 너무 멀다고 느끼는 사이에 공격 당하기 십상인지라 꽤나 애를 먹는 부분이었지.

이 동영상(유튜브 동영상 링크)에서 센다 선생님이 알기 쉽게 해설해 주실거야.


Q. 시마바라・아마쿠사 봉기는 왜 일어난거야?

기독교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라고 많이들 알고있지만,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어. 하라성을 건축한 아리마 하루노부의 아들 나오즈미 대신 새로운 영주가 된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하라성을 폐성하고 1618년부터 시마바라성을 축성하기 시작했어. 그 비용을 변통하기 위해 걷은 소작료때문에 다들 가난에 헐떡이며 힘든 생활을 보내야했다고 해.
고통스러운 생활에 지탱이 되어준 기독교의 가르침. 그것조차 종교 금지령으로 인해 신앙활동을 할 수 없었지. 거기에 기근까지 덮쳐 결국에는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농민과 어민들이 들고 일어섰어. 그렇게 시마바라・아마쿠사 봉기가 일어나게 된거야.


Q. 봉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가했어?

농민과 어민이 중심이 됐고, 무사도 있었어. 신분을 넘어 많은 사람들이 참가 했지. 그 수가 약 2만수천명(여러가지 설이 있지만)에 달했다고 해. 하루노부가 키리시탄을 보호했기 때문에 당시 미나미시마바라나 그 주변에는 많은 키리시탄들이 있었어.

Q. 봉기군의 적은 누구였어?

막부군이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종교 금지령을 내린 것은, 키리시탄 다이묘가 해외와 무역을 통해 재산을 불려 힘을 키워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해. 혹시라도 봉기군이 이긴다면 기독교 세력은 한번에 커져 전국의 키리시탄들이 봉기할 것이라 생각했어. 그렇게 되면 해외로부터의 침략에서 자유로울수 없었지. 막부는 무조건 이 봉기만큼은 저지해야했고, 그래서 하라성까지 약 12만명에 달하는 군대를 보낸거야. 각지에서 모여든 막부군 중에 미야모토 무사시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해. 검술의 달인이었던 무사시가 봉기군이 던진 돌에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Q.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는 공법을 썼다던데, 어떻게 3개월이나 농성을 할 수 있었던 거야?

하라성은 절벽에 지어져서 얼핏 보면 궁지에 몰리기 쉬운 장소로 보이지만, 사실은 바다를 향해 여러개의 문이 열린 구조였어. 봉기 후반전에 처음으로, 식량이 바닥났었는데, 고향의 바다를 너무 잘 알고 있던 봉기군들은 배로 바다에 나가 식량을 보급할 수 있었다고 해. 성 안에 물이 나오는 샘이 있었던 것도 긴 시간 농성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야.


Q. 2만 수천명(여러 설이 있음)이나 되는 봉기군이 전멸한 후에 미나미시마바라와 그 주변의 마을에는 사람이 없었던 거야?

응 맞아. 대부분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마을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어. 그래서 막부는 강제적으로 이민을 시켰지. 때문에 소작료 면제 등 다양한 우대 정책이 실시됐어.


Q. 하라성 터는 왜 세계유산이 된거야?

키리시탄이 「잠복」하는 계기였던 시마바라・아마쿠사 봉기의 발생과, 기독교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야.
하라성 터는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키리시탄 관련 유산」의 구성 유산 중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는데,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키리시탄 관련유적」은 열 둘의 구성 자산이 모여 하나의 가치를 이루고 있어. 하라성 터는 그 스토리의 출발점에 있지. 세계문화유산을 돌아보려면, 이곳 하라성 터부터 시작하는 걸 추천해.


하라성 터의 기본정보를 배운 외계인은, 무사히 미나미시마바라 관광을 위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가이드. 뜨거운 태양 아래, 파란색 점퍼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예약 필요 없음】 추천! 하라성터 원 코인 가이드!
토/일요일과 공휴일에 한해, 관광가이드가 하라성터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기 쉽게 안내해드리니, 꼭 이용해 보세요.
"접수시간: 9시30분~16시(※연말연시 및 우천시 중지)
접수장소: 하라성터 종합안내소
요 금: 성인 1인 500엔 / 중학생 이하 무료 / 가족 한팀 1,000엔
안내장소: 하라성터 혼마루
소요시간: 약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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