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book twitter instagram Line

이벤트

바다를 내편으로 삼은 성, 하라성

바다를 내편으로 삼은 성, 하라성


TV방송에서도 「최강의 성」으로 소개 된 적이 있는 하라성 터. 혼마루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전망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광활히 펼쳐진 하늘. 푸른 바다 너머에는 쿠마모토현 아마쿠사시가 보입니다. 바다의 반대 쪽으로 눈을 돌리면, 헤이세이신산이 우뚝 솟아 있는 절경이 보입니다. 하늘에서 찍은 하라성터의 다른 사진을 볼까요?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내륙 쪽에는 각지에서 모인 약 12만명이나 되는 막부군이 포진. 바다에 막혀 도망칠 곳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데요, 한 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도망칠 곳이 없는 입지임에도 불구하고, 하라성은 어째서 「최강의 성」이었던 걸까요?


봉기군에게 「바다」는 길이었다.



남겨진 하라성의 그림들을 조사해보니, 오오테문, 다지리문, 렌치문, 오오에문 등 하라성에는 몇몇개의 문이 바다 쪽을 향해 나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라성은 아리아케해로 열려있는 「바다의 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하라성 주변 해역은 조류가 복잡하여, 막부군은 배를 세워두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와 달리 아리아케해를 아주 잘 알고있는 봉기군은, 막부군의 봉쇄망을 돌파하여 배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식량 공급로를 막는 공법에 맞서야 했음에도, 2만수천명(여러 설이 있음)이 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약 3개월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다를 통해 물자를 조달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하라성에서의 농성이 결코 독안에 든 쥐의 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라성터・히노에성터 전문위원회 위원인 핫토리 히데오씨의 연구에 따르면, 아마쿠사 시로 등은 전국의 키리시탄(당시 일본의 카톨릭 신자)들에게 한꺼번에 봉기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면서, 마카오를 거점으로 하고 있는 포르투갈 지원군들을 부르는 작전도 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리아케해에 면하고 있는 하라성은, 포르투갈 함대를 기다리는데에 최적의 입지였습니다. 일본 각지와 연결하여, 세계와의 연계를 구상했던 봉기군은 장대한 작전 아래, 충분한 승산을 가지고 농성을 펼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봉기군이 기대했던 각지의 키리시탄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 동아시아 제해권을 빼앗겨가던 포르투갈은 지원군을 보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농성했던 봉기군 약 2만 수천명 중 대부분이 목숨을 잃는 장렬한 전투 끝에, 하라성은 낙성되었습니다.
만약 각지에서 봉기가 일었더라면...
만약 포르투갈이 함대를 파견했더라면...
그 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TOP